《레이먼드 카버의 말》이라는 책을 읽으며 나는 작가들이 글을 얼마나 많이 고치는지, 그리고 그 일에 얼마나 진심인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짧은 단편을 스무 번?” “시 한 편을 3년 동안 백 번이나?” “20년간 한 작품을?” 책에는 말도 안 되는 고쳐쓰기 횟수가 적혀있었고, 나는 에세이를 쓰며 열다섯 번을 고쳐 썼다는 사실이 작가들 사이에서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라는 것에 조금은 머쓱해졌다. 그렇다면 아직 몇 번 정도 더 고쳐 쓸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원고를 출판사로 보내고 갑자기 할 일이 없어져 휑해진 상황에 나는 약간의 불안함을 느꼈다. 내가 쓴 글을 읽고 글을 고치느라 머리가 뜨거워졌었던 게 불과 어제였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고칠 부분은 여전히 많지만 언제까지 고칠 수는 없기에 할 수 있는 만큼 수정을 하고 시원 섭섭하게 원고를 보낸 후였다. 한편으로는 좀 더 수정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더 이상 원고를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인지 다 되었다는 안도감보다는 글이 제대로 마무리된 건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원고를 받은 편집장님에게 피드백을 받으려면 시간이 더 걸릴 듯하니, 그렇다면 그 사이에 나는 미뤄두었던 기타 교재를 만들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는 에세이를 쓰던 에너지 그대로 새로운 교재 작업을 시작했고 일주일 만에 38페이지 분량을 작업했다.
원고에 계속 몰입을 하는 중이어서 찜해둔 넷플릭스와 애플 티브이 드라마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위아래로 스크롤을 하면서 찜해둔 드라마가 점점 많아졌지만 실제로 플레이 버튼을 누르지는 않았다. 한두 편 시도했으나 다음 편을 보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나는 교재 원고로 다시 돌아와 글을 쓰고 악보를 만들었다. 나의 불안은 편하게 앉아 드라마를 감상할 여유로움을 허락하지 않았다.
에세이 초고를 완성한 후 두세 번만 보면 마무리되겠지 싶었던 것이 안일함이 시작이었다. 나는 원고의 처음부터 끝까지 천천히 읽으며 문장을 고치고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을 다듬었다. 그렇게 두세 번가량 보았을 때, 마음속에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내가 쓴 글이 전혀 에세이처럼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글은 에세이와 설명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대충 줄거리만 나열하고 있었다. 초짜인 내가 봐도 어색한 부분이 차고 넘쳤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글을 읽으며 어색한 부분을 수정했다. 설명이 부족하다 싶은 부분에서는 내용을 더 채워 넣었고 흐름이 이상하면 한 문단을 열 번도 넘게 읽으며 문장을 다듬었다. 글은 점점 길어졌다. 세 번째로 고치고 나니 250 페이지가 넘어 있었다. 이제는 되었겠지. 한두 번 더 보면서 오탈자 정도만 고치면 될 거라 생각하고 처음부터 다시 읽는데, 글은 여전히 이상해서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글을 쓰다가 막히면 다자이 오사무의 산문을 읽었다. 그리고 내 글과 비교해 보았다. 이건 글도 뭐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경숙 작가의 소설을 읽고 다시 내 글을 읽었다. 내 글은 구성에서 이미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열 번 정도 수정을 했을 때, 조금의 실마리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런 긴 글을 처음 쓰다 보니 글의 톤을 일관되게 만드는 방법도, 에피소드 속에 의미를 담는 방법도 서툴렀다. 나는 중간쯤 된 글을 몇몇 사람들에게 보내 피드백을 받았다. 이메일을 보내는데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이대로는 사람들에게 보일 수준이 아니구나 싶었다. 그러나 피드백은 앞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 분명하다.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사람들로부터 글에 대한 회신을 받았다. 그들은 내 글에 정성스럽게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 알려주었다. 이야기의 얼개에 대한 지적, 너무 세세해서 굳이 필요 없는 디테일, 내용과 상관이 없는 알 수 없는 의미의 결말까지. 글쓰기의 실마리로 여겼던 것들은 전혀 해답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문단 전체를 지우거나 챕터를 전부 버리기도 했고 때로는 방금 쓴 세 페이지의 글도 지우면서 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피드백 이후로 나는 세 번가량 다시 글을 수정하였다. 수정했다기보다는 전부 새로 쓴 것이 맞다. 내용도 많이 바뀌었고 글도 많이 바뀌어 이전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글처럼 느껴졌다. 그러면서 글이 많이 정제되었고 200 페이지 정도로 줄어들었다. 아침에 머리를 감으면 머리가 한 움큼씩 빠지기도 했다. 글을 쓰지 않으면 평범하게 책이나 읽고 소소하게 글이나 쓰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을 텐데, 글을 완성도 있게 마무리하고 싶다는 생각 때문에 나는 인생에서 가장 힘들고 막연한 시간을 지나고 있었다.
‘다 되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그만큼 고쳐 쓰는 데 나는 나의 모든 것을 걸었다. 열다섯 번쯤 되니 스물한 편의 글을 묶은 책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어렴풋이 방향이 보이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에세이의 수준을 달성할 수 있을까. 편집장님이 요청한 일정이 다가와 처음에는 15일 미루었고, 다시 7일을 미루어 겨우 원고를 완성했다.
이렇게 마무리가 힘겨웠던 탓에 나는 한동안 글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미뤄두었던 일도 전혀 손에 잡히지 않았고 홀가분해야 할 마음이 전혀 그렇지 않았다. 글이 여전히 미완성이라서 그런 걸까. 아니면 미뤄두었던 일을 하지 않아서일까. 불안할 때는 그 원인을 찾아야만 마음이 풀리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음 한편이 뭐에 걸리기라도 한 듯 계속 신경이 쓰인다. 나는 마음속에 도대체 왜 이런 불편함이 자리 잡았는지 여러 가지 해답을 제시하며 마음의 모양과 맞춰보았지만 마음은 제대로 된 해답을 말해주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떤 초조함에 대해 알게 되었다.
초짜가 쓴 글. 나는 나의 글쓰기 수준이 에세이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문장 수준도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글을 고쳐 쓰는 내내 내가 원하는 수준의 글이 되려면 얼마나 글쓰기 실력이 좋아져야 할지 막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런 글을 쓸 체급이 아닌데 억지로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글을 완성할 만한 실력이 아니니 글쓰기는 잠시 미루고 그만두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잠깐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나는 수정을 멈추지 않았다. 마치 글쓰기에 쫓기듯 글을 썼다.
무리하면, 삶은 색을 잃어 무채색이 되어버린다. 만약에 내가 글을 조금 더 느긋하게 썼다면 지금보다 나은 마음이 되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 글쓰기에 1년 6개월이나 몰두하고 있었다. 삶을 거의 팽개쳐놓고 언제까지 글쓰기에 시간을 쏟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급해졌고, 글은 나오지 않았고, 시간은 흘러갔다. 내 글을 맡아주시기로 한 편집장님이 기한을 정해주었기 때문에 그 기한이 다 될 때까지 필사적으로 글을 고쳤다. 그리고 글을 떠나보내기 싫은 섭섭한 마음을 가득 담아 전송 버튼을 눌렀다. 나는 이미 글쓰기에 닳고 닳아 빛을 잃었고 다른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일상은 잿빛이 되어 있었다.
며칠이 지나는 동안 나는 다른 일을 하지 않고 이러저러한 일로 시간을 보냈다. 도서관에서 카버의 단편 소설과 다른 작가들의 소설집 몇 권을 빌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조용히 거실에 앉아 두 시간쯤 책을 읽었다. 이렇다 할 사건이 없는 카버의 단편에는 상황의 정밀함, 그리고 사람들의 생생함이 느껴졌다. 살아간다는 것은 이런 생생함을 발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들고 거실을 찬찬히 살펴보았는데 책을 읽는 시간이 보다 생생해지는 인상을 받았다. 창문에 비친 햇볕이 노란빛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 후로 며칠을 더 보내며 책을 읽었고, 넷플릭스를 열어 고레다 히로카즈 감독이 연출한 드라마 ‘아수라처럼’을 보기 시작했다. 출판 계약서 초안을 천천히 읽고 작성하여 편집장님에게 보내드리고 미끄러운 마룻바닥을 물걸레로 청소했다. 처음에는 이 모든 일을 억지로 했다. 떠나보낸 글에 신경 쓰지 않기 위하여, 그리고 작은 것에 숨어있는 이야기를 발견하기 위해여 사소해졌다. 자연스러운 듯 억지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하게 했다. 그러는 사이에 나도 모르게 초조함은 조용히 사라져 있었다. 일상의 생생함을 조금씩 되찾으며 나는 마음에 평안을 회복하였다. 불편했던 마음은 정답을 맞혔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한 가지에 집중하지 못하면 불안해지는 그런 삶은 몸에 좋지 않다. 사업을 하면서 줄곧 그렇게 지내온 탓에 글도 그렇게 써왔다.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다짐을 여러 번 했지만 이번에도 그랬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럴 때 보라고 이 글을 적는다. 에세이를 쓰는 동안 글의 톤이 많이 정리되었다는 걸 느꼈다. 보다 긴 호흡으로 쓰는 방법도 몸에 익어서 글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배우게 되었다. 이제야 창밖의 봄 날씨가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