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강이님과의 점심 약속이 있어서 전철을 타고 서강대로 향했습니다. 가는 동안에는 다자이오사무의 에세이를 읽었는데요. 읽다보니 각주에서 놀라운 장면을 발견했습니다. 몇몇 작품들은 다자이가 말로 불러주면 아내가 그걸 받아 적는 구술방식으로 썼다는 겁니다. 저는 머리가 띵 해서 말을 글처럼 할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물론 말을 글처럼 하는 사람을 몇 번 본 적은 있습니다. 여러분이 다 아시는 유시민 작가, 이동진 평론가, 김영하 작가, 유현준 건축가는 말을 글처럼 합니다. 이들의 말은 대체적으로 군더더기가 없고 담백합니다.
물론 저는 이렇게 이야기하는 게 어렵습니다. 하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어요. 할 말의 앞뒤를 조리있게 (즉석에서) 배치하고 의도에 맞게 설계하기도 전에 뭘 말하려고 했는지 이미 까먹습니다. 그래서 저랑 대화하는 분들은 종종 제가 하는 질문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제가 무슨 말하다가 여기까지 왔죠?” 말 잘하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말의 의도와 맥락을 잘 기억하고 다른 길로 새지 않습니다.
그래서 발표같이 준비된 멘트를 하는 것이 저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준비된 멘트를 날리는 게 어렵기 때문에 구어체의 편한 단어들로 바꿔 말하는 편인데 전달력이 떨어지고 중언부언 합니다. 그나마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문맥을 고쳐쓸 수는 있으니까 말보다는 전달력이 조금 나아진 듯 해요.
거의 3년만에 강이님을 만나 쌀국수를 먹고나서 카페에 갔습니다.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면서 강이님의 그 미칠듯한 기억력에 오늘 저는 감탄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강이님은 제가 연남동 지하 작업실에 있던 시절 같은 건물 1층에서 카페를 하고 계셨는데 저의 가족은 물론이거니와 저에게 레슨을 받았던 사람들, 글쓰기 모임에 왔던 사람들도 대부분 기억을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제가 기억 못하는 것도 알고 계시더라고요. 평생 건망증에 시달려온 사람으로서 상세한 기억력이 부럽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그나마 요즘은 말의 그 ‘맥락’을 기억하고 이야기 해야 한다는 생각이 자리잡게 되어 말하는 도중에 까먹는 일이 덜해졌습니다. 오늘도 두번 정도 대화의 길을 잃을 뻔 했는데 이것도 하다보니 조금씩 개선이 됩니다. 하지만 말을 글처럼 하는 것은 요원한 일입니다. 이것은 될리는 없겠지만 아마 평생을 목표로 두고 살아가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