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권씨, 오늘 점심은 밖에서 부대찌개 먹을까?” 방학을 맞아 한껏 늦잠을 자고 집에서 뒹굴거리던 중2 녀석을 일으켜 세우며 물었다. 윤권씨는 흔쾌히 가겠다고 했다. “그럼 서둘러야 돼. 11시 30분에는 나가야 하거든.” 점심시간이 임박하면 어느 식당이든 자리가 없다. 그러니 늦어도 11시 40분에는 도착해야 한다.
집에서 멀지 않은 ‘개롱골’에는 오래된 부대찌개 가게가 하나 있다. 메뉴는 단 하나 부대찌개다. 술도 안 팔고 다른 메뉴는 아무것도 없다. 오직 부대찌개로 승부한다. 손님이 앉으면 인원수대로 부대찌개가 나온다. 면사리를 넣을지 말지만 이야기하면 되는 전설 같은 맛집. 나는 가끔 나를 만나러 오는 사람들과 온 적이 있었고 식구들과는 한 번, 윤권씨와는 처음으로 같이 간다.
방학이 되면 나처럼 게으른 주부는 점심 저녁을 대충 때우기가 일쑤다. 어제는 우동을 먹었고 그제는 새우를 넣은 김치볶음밥을 해먹었다. 그 전날은 제육볶음에 숙주를 넣어서 먹었고 그 전날에는 칼국수를 끓여 먹었다. 특히 방학이면 아이와 함께 점심마다 뭔가를 해먹어야 하는 운명의 굴레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에 이처럼 지루하지 않은 식단을 준비하는 게 중요하다.
요리적 상상력이 부재할 때는 변주를 가한다. 김치찌개에 어묵을 넣거나 당면을 넣는 식이다. 그러면 같은 김치찌개를 여러 회 반복하면서도 지루하지 않다. 김치찌개를 끓이는척하면서 사골육수를 넣고 햄을 추가로 넣으면 부대찌개가 된다. 그러면 윤권씨는 엄연한 부대찌개로 인식하고 맛있게 먹는데 “아빠, 라면사리 넣어줘.” “천 원인데.” 그래도 꿀맛으로 먹는다.
다행히도 윤권씨는 늘 맛있게 먹어준다. 입맛이 까다롭기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기 때문에 맛이 없으면 뭘 갖다 놓아도 안 먹는다. 그러니 내가 집으로 들어와 주부 생활을 할 때부터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윤권씨에게 제안했고 그는 나의 의도대로 점점 자극적인 맛에 점차 길들여졌다. 하루는 윤권씨에게 가장 맛있는 음식이 뭐냐고 물었더니 ‘아빠표 김치찌개’라고 말해주었다. 녀석… 중학교에서 세상 사는 법을 가르쳐 준다더니 사실인거 같다.
하지만, 아무리 매일 집에서 맛있게 해먹는다고 해도 바깥 음식 고픈 날이 있다. 특히 오늘처럼 밥하기 귀찮을 때 그렇다. 윤권씨에게 사제 음식을 제안하면 언제나 좋다고 하지만 물론 내가 더 (밥을 안 해서) 좋아하는 편이다. 보통 윤권씨의 선호 음식에 맞춰 제시하기 때문에 거절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게 오늘도 개롱골로 향했다. 부대찌개 2개인분을 시키고 면 사리는 너무 많을 것 같아서 시키지 않았다. 당면이 들어 있으므로 그걸로 충분했다.
부대찌개가 보글보글 끓자 이모님이 뚜껑을 휙 채가시며 “조금 더 끓으면 불 줄이고 드세용~” 우리는 자리에 앉아 아무 말도 없이 부대찌개 2인분을 조졌다. 뜨끈한 부대찌개에 잘 지어진 차조밥이 어우러진다. “그래 이 맛이야.” 역시 내 실력보다 자본주의 맛이 한 수 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