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면도로

아침에는 머리를 좀 깎을까 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씻은 후 조천농협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첫 번째 보이는 미용실은 문이 열려있어 먼발치에서 안을 보게 되었는데 헤어롤을 잔뜩 말고 있는 할머니 두 분이 줄지어 앉아있었다. 10시도 안 된 시간인데 오우 장사가 잘되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다음 미용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거기도 할머니 두 분이 헤어롤을 잔뜩 말고 있었다. 미용실로 들어서자 사장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나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었다. “이발 되나요?”했더니 11시 30분쯤이면 된다고 한다. 그때는 밥 먹으러 갈 예정이라 알겠다고만 이야기를 하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머리를 감고 노트북과 책 한 권을 가방에 넣은 후 국밥을 먹으러 차를 몰았다.

10분을 달려 며칠 전 봐둔 국밥집에 도착하여 시래기 국밥을 하나 시켰다. 흑돼지가 들어있는 시래기 국밥이었는데, 돼지 냄새가 싫은 나여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내장탕이나 그 외의 각종 고기류가 듬뿍 들어간 국밥은 싫다. 나는 그 냄새를 못 맡는다. 순대 국밥도 순대만 들어있는, 그 평범하게 생긴 찰순대만 있는 국밥을 먹는다. 다른 종류의 순대는 거의 먹지 않는다. 아니 못 먹는다. 그래서 나의 국밥 1순위에 시래기 국밥이 있는 것은 이유가 있다. 11시쯤 도착하여 이른 점심을 먹고 나는 케이크를 먹으러 출발했다.

한 시간을 운전해 쉬리니 케이크에 도착했다. 남자 혼자 케이크를 먹으러 가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하지만 바로 전날 문해일 유튜브 채팅창에서 쉬리니 사장님에게 내일 가겠다고 말했었기 때문에 그 약속도 지킬 겸, 케이크의 맛도 궁금한 겸해서 방문을 했다. 순전히 즉흥으로 결정한 일이다. 남자 사장님은 붙임성이 좋고 쾌활했다. 나에 대한 소개를 간략히 드리고 나니 특유의 붙임성으로 십여 분간 즐거운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매장에 방문하는 손님들의 대부분은 이미 얼굴을 알고 있는 듯 인사를 나누고 그들과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화로 가득 찬 공간의 분위기는 밝고 화기애애했다. 처음 오는 손님들은 남자 사장님의 활기찬 어서 오세요 인사를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나는 인사할 때마다 그의 친근감 있는 발성이 좋았다.

케이크는 달지 않고 내용물과의 조합이 좋았다. 생크림이 느끼하지 않았고 질리지도 않아 조화가 잘 된 느낌이었다. 케이크 위에는 여자 사장님이 직접 따오신 야생화가 올려져 있어 이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제주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대략 세 시간가량 책을 읽고 작업하던 글을 수정하였다.

작업을 적당히 마무리한 후 사장님께 다음에 또 오겠다는 인사를 드리고 자리를 떠났다. 나는 차를 몰아 근처 서점 한곳으로 향했다. 서점 근처에 주차를 했지만 차에 앉아있기만 하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책을 고르는 것은 서점마다 진열된 취향과 분위기에서 조용히 나를 기다리던 책을 만나는 행위다. 그렇게 만춘 서점에서 세 권의 책을 가져왔다. 그런데 아직 다 읽지 못했기 때문에 약간의 부채감이 있는 것이다. 다자이 오사무의 다른 소설도 읽고 있는 중이었기 때문에 그것 역시 마무리 지어야 했다.

이제는 책을 고르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것도 서점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여기에 더해 저녁을 사가지고 숙소로 돌아가야 했고 가는 길도 한 시간이나 걸리다 보니 서점에 들어가면 뭔가 책을 살 것 같은데, 시간에 쫓겨 잘못된 선택을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고르는 일은 필수품을 사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결이 있었다. 나의 선호와 애호가 맞는 책을 고르는 것에는 꽤나 긴 시간이 걸리고 그렇게 하나하나 찾아내는 책이 모두 내가 원하던 책이 되지는 않을수도 있다는 약간의 불안함 때문에, 나는 다음을 기약하고 서점 주차장을 떠났다.

저녁을 어디서 먹을까 하다가 햄버거를 하나 사서 숙소에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주는 6시 이전에 문 닫는 집들이 많아 서둘러 애월에 있는 버거집을 검색한 후 차를 몰았다. 문을 닫았다. 차를 돌려 다른 집으로 향했다. 버거 세트를 하나 포장으로 주문하고 조리하는 동안 밖을 내다보니 저 멀리에 커다란 해상 풍력발전기가 보였다. 기다리는 동안 나는 그것을 조금 가까이에서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포장된 버거를 들고 다시 차를 몰아 해안 도로로 접어들었다.

귀덕리 쪽으로 방향을 잡고 나는 풍력발전기가 보이는 적당한 자리에 주차를 하고 사진을 찍었다. 풍력발전기는 바다 중간에 튼튼하게 버티고 서서 열심히 프로펠러를 돌리고 있었다. 파도가 치는 바다와 함께 몇 컷의 사진을 찍고 나는 감자튀김을 먹으며 다시 해안 도로를 따라 천천히 달렸다. 그러다 세 남자를 만났다.

그들은 발목까지 오는 바다에 서서 긴 낚싯대를 드리웠다. 무얼 낚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바다 위에 서 있는 모습은 비현실적이었다. 어망 속에는 물고기가 펄럭이고 있었고 그들은 파도치는 바다에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십여 분 가량 낚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오늘은 이 장면을 보기 위해 하루를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뭘 할지 계획한 것과 계획에 없었던 것들을 지나며 그게 모여 오늘의 하루가 되었다.

어제는 계획하지 않아 시간이 많이 틀어졌고 저녁나절까지 그게 신경 쓰였다. 어제 잘못 쓴 시간과 돈이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시간의 여유가 없으면 마음이 강팍해지고 돈의 여유가 없으면 위축된다. 딱 그런 하루였다.

그런 날은 복기가 무의미하다. 복기를 하는 것이 더 나은 삶으로의 좋은 습관이 될 수는 있지만, 거기에만 빠져있다 보면 주변을 돌아보기가 어렵다. 내 세상에 갇혀 도로를 따라 목적지로 가는 것에만 신경을 쓰겠지. 이면도로를 들어가 새로운 것을 경험할 각오를 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만날 좋은 것들을, 좋은 파도, 좋은 장면들을 죄다 놓칠 수도 있다. 어제처럼 의미 없게 느껴지는 날도 삶의 일부다. 이런 저런 날이 모여 삶이 된다.

숙소로 돌아와 햄버거를 먹으며 유튜브를 보았다. 감자튀김을 다 먹어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