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리지 않는

어제 이선영이 선물로 준 베개를 베고 잠을 자다가 12시쯤 일어났다. 이렇게 늦게 일어나기는 올해들어 처음이다. 나는 침대에 파묻혀 이선영에게 전화했다. “네~” 그녀는 거실에서 전화를 받는다. 내가 점심을 먹었는지 물었더니 권이와 이미 다 먹었다고 한다. 그럼 나는 점심을 혼자 먹어야겠다 싶어 부엌으로 나가 개수대에 쌓인 그릇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물로 간단히 씻은 초벌 그릇을 식기세척기에 가지런히 넣었다. 다듬어놓은 파가 싱크대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길래 누가 여기에 놓은 거야 의심하면서 가지런히 모아 10여 분 동안 모두 잘게 잘라 봉투에 담아 냉동실에 넣었다. 하는김에 옆에 놓인 압력밥솥도 설거지하려고 뚜껑을 열었더니 열 수 없었다. 또 이러네. 엊그제도 밥솥이 열리지 않아 고생하다가 열었는데 또다시 이렇게 되었다. 

고장이 나서 뚜껑이 열리지 않는 압력밥솥은 어떻게 해야 열리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압력이 다 빠졌는데도 뚜껑은 열릴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미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밥솥 안에는 분명 다 된 밥이 있을 것이다. 이렇다는 뜻은 밥을 했지만 먹지 못했다는 말도 된다. 이선영과 윤권은 점심으로 뭘 먹은 걸까. “자기야, 점심 어떻게 먹었어?” 나는 열릴 줄 모르는 뚜껑을 하염없이 흔들다가 손목이 나갈 것 같아 이내 그만두고 밥솥을 옆으로 치워버렸다. 밥솥은 어떻게 분리수거를 하나 궁금했다. ‘경비원 아저씨, 이거 속에 밥이 들었는데 열지를 못해서 그냥 버리려고요. 근데 이 속에 밥은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야 하나요. 근데 뚜껑을 열 수가 없어요.’ 말 같지도 않은 상상을 했다. 뚜껑은 포기하고 냄비에 물을 올려 짜파게티와 오이소박이를 먹고 84페이지부터 교재 작업을 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