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영은 오후에 집에 도착해 잠깐 낮잠을 자고 4시쯤 되어 마사지를 받기 위해 문밖을 나서는 중이었다. 그러고는 나에게 전화하면 데리러 나오라는 말을 하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금요일 오후, 회사에서 일찍 돌아오는 날에는 늘 같은 시간에 피부관리를 받으러 간다. 나는 알겠다고, 전화하라고 대답을 한 후 한참 열을 올리고 있는 통기타 교재 작업을 이어 나갔다. 나간 지 몇 분 되지 않아 새로 연 이케아에 가면 어떻겠냐는 메시지가 왔다. 이케아 좋지, 그러면 그전에, 식당에 들러 저녁을 먹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알겠다고 메시지를 보내고 어느 식당에 갈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평소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즐겨 찾던 멕시칸 음식점 하나가 떠올랐다. 이케아 가는 길에 있어서 동선도 괜찮다. 나는 마사지가 끝나면 그곳에서 저녁을 먹고 이케아에 가자고 말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혼기념일로는 조촐한 저녁이 될 것이다.
결혼한 지 16년이 되어 이제는 서로를 대하는 것이 처음보다는 자연스러워졌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 16년 동안 우리는 각자의 경계선을 알게 되었고, 그걸 알기까지 많은 과정을 거쳐왔다. 좋아하는 것, 좋아하지 않는 것, 그리고 왜 그런 호불호가 생겼는지에 대한 서사까지 이제는 내 마음을 헤아리듯 어렵지 않다. 서로에 대한 새로운 면이 있기는 한 걸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서로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마음이 가까워지면 서로의 마음도 조금은 헤아릴 수 있게 된다. ‘이선영이 싫어하겠지?’라는 생각이 들면 하다가도 멈추게 되고, 가끔 미운 생각이 들어 될 대로 되라지 싶을 때도 ‘그러면 이선영이 서운해하겠지.’라는 생각이 들어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서운해하지 않을 일을 하러 나가기도 한다. 마음이 가깝다는 것은 그게 내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게 자신만의 영역을 서로 존중하여 침범하지 않는 예의도 이제는 갖추게 되었다.
우리는 자주 장난을 치고 때때로 자신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서로 바쁘면 각자의 일을 하고 그다지 터치하지도 않는다. 서로에게 소홀하다고 느끼지도, 그것에 서운해하지도 않는다. 먼발치에서 서로의 일을 신경 쓰지 않지만, 그러면서도 서로의 삶에 무엇이 필요한지 파악하고 있다. 욕심이 없어서일까, 이제는 가지고 싶은 물건도, 필요한 것도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몇 년 전부터 나는 생일에 아무것도 가지고 싶은 게 없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지난 생일에는 허리가 아파 누워있던 나에게 낮은 베개를 하나 선물해 주었다. 나보다 나의 필요를 조금 더 잘 헤아릴 줄 안다. 이번 결혼기념일에도 우리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준비하지 말자고 말을 맞춘 것도 아닌데, 결국 이렇게 될 줄 알고 있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권이가 학원에 가면 우리끼리 저녁이나 먹고 시간을 보내자는 얘기를 며칠 전에 아주 잠깐 했었더랬다. 아, 그래서 이케아를.
전화가 와서 차를 몰고 마사지 가게 앞으로 갔다. 날씨는 흐리고 비가 내렸다. 나는 비를 피해 차에 탄 이선영에게 멕시칸 식당에 가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안 된다며, 이케아 식당이 지금 50% 할인 중이라며 거기를 꼭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이케아를 가는 이유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이 하찮음에 웃음이 터져 서로 낄낄대며 웃었다. 결혼기념일에, 그것도 오랜만의 데이트에 이케아 식당 50% 할인 메뉴를 먹으러 가는 사람이 우리 말고 또 있을까. 주메뉴만 할인되고 사이드는 할인 안 되니, 그건 아까워서 먹으면 안 된다고도 말했다. 오케이 알겠어. 나는 이렇게 조금은 황당하고 격식 없는 이선영이 마음에 든다.
생각해 보니 집에서 이케아 안에 있는 식당이 6월 말까지 평일에 50% 할인한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할인 상품, 배달비 무료 같은 주최 측의 홍보 활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이선영은 이번에도 50%라는 거대한 할인에 마음을 빼앗겼을 것이다. 심지어 5만 원 이상 이케아 상품을 구매하면 1만 원 할인 쿠폰을 주는 행사도 있으니 봐둔 물건 몇 개도 사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충전 배터리를 살 때가 되었다.
평소라면 나가자고 말만 할 뿐 실제 행동으로 나서는 경우가 좀처럼 없지만, 오늘은 그 모든 귀찮음을 마다치 않고 집 밖으로 나와 이케아로 가는 길이다. 나도 이선영도, 심지어 권이도 집돌이다. 비 오는 평일 저녁에 어디론가 향하는 이 상황은 결혼기념일이라는 상징성이 한몫했다. 웬만해서는 좀처럼 밖으로 나가는 일이 없는 우리에게 이케아를 가는 일은 꽤 큰 행사이다. 이케아가 아니었다면 아마 사다 놓은 고기를 집에서 구워 먹고 느긋하게 각자의 자리에서 유튜브를 보며 저녁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이케아에 도착해 주차를 하고 있었다.
일곱 시가 조금 못 되어 이케아에 도착했다. 그리고 가장 빠른 지름길을 따라 식당에 도착했다. 사람들의 무리가 어마어마한 것이 보였다. 이케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식당에 모여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되었다. 우리는 온라인으로 이것저것 주문을 하고 번호를 확인하였다. 6186번인데 모니터를 확인해 보니 이제 갓 6050번을 넘어가는 중이다. 우리 앞으로 주문이 130건이나 밀린 걸까? 사람들이 치일 정도로 많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처음 느껴보는 대기 숫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 보통은 키오스크마다 번호 체계가 다르니까 우리가 받은 번호도 순서대로 나오는 게 아니라 해당 키오스크, 우리로 따지면 모바일로 결제한 순번일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번호는 순서대로 올라갔다. 나의 상상은 여지없이 빗나갔고 순번이 하나씩 올라가는 그 시간을 온전히 화면만 바라보았다.
대략 30분 후에는 음식이 나왔고 드디어 결혼기념일 만찬을 즐길 때가 되었다. 파스타, 돈가스, 치킨 스테이크, 그리고 망고 샐러드를 먹었다. 우리는 16,600원으로 결혼기념일을 누렸고 둘 다 만족할 만한 식사를 마쳤다. 그리고 천천히 이케아 내부를 걸어 다녔다. 필요한 게 있으면 한두 개씩 바구니에 담았다. 냉감 이불이 있길래 이것저것 만져보며 오 정말 차갑네, 저건 아니네! 등등의 사소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옆에는 메모리폼 베개가 있길래 잠깐 누워보았는데, 나름 감기는 맛이 있어 이거 괜찮은데라는 견해를 이선영에게 적극 피력했다. 결혼기념일 선물로 구매해 주겠다고 선뜻 말한다. 가격은 29,900원, 합리적이다. 배터리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아 구매를 포기하고 한두 가지 물건을 더 구매해 5만 원을 맞추었다. 셀프 계산으로 결제하고 1만 원 할인을 추가로 받아 계산대를 나왔다. 이케아를 나갈 때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먹는 게 국룰이다. 우리는 망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완벽한 결혼기념일이라며 서로 이야기를 했다.